6월 3일의 기록

어제 산책로에서 백색의 비둘기를 보았다. 물론 흔하다면 흔한 백색의 비둘기지만, 그래도 찾아보려면, 또 안 보이니까 본능적으로 카메라를 들이댔다. 그런데 이놈의 비둘기는 사람 때를 많이 타 본 건지, 내가 다가가도 피하지 않았다. 나와 50미터 거리에도 미동도 없고, 포즈를 취하는 듯이 아주 여유로운 자태로 찍어보려면 찍어보렴 식이였다. 오히려 너무 가까이 다가와서 내가 두려워서 급하게 사진을 찍고 내가 후다닥 도망 나오듯이 창곡천으로 내려가는 계단을 밟았다. 무슨 새가 이리 저돌적이지? 

그 후에 정처 없이 걷다가, 물 위에 떠있는 흑색의 새를 보게 되었다. 창곡천을 거의 매일 걷다시피 했을 적에도 한 번도 마주친 적이 없는 종류의 새였다. 무의식적으로 이 새를 찍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이 새는 쉽사리 자신을 나의 카메라에게 내주지 않았다. 창곡천은 넓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쉽사리 맞은편으로 한숨에 갈 만큼 거리가 좁지는 않은 넓이인데, 내가 새가 떠있는 쪽으로 가면, 새는 나를 약 올리듯이 유유히 잠수하여 반대편으로 향해서 가버렸다. 잠수는 어찌 그리 많이 하던지. 멀리서나마 찍으려면 5초를 못 버티고 다시 잠수를 해버리다니. 아마도 잦은 자수의 이유는 검은 털이 빛을 다 흡수해서 더워서 잠수를 많이 하는 건가 싶기도 하고, 아니면 그냥 배가 고팠거나. 

미리 올라올 지점으로 가있으려고 해도 이놈의 물이 탁하다 못해 아예 색이 입혀져서 보이지가 않았다. 물 안에서 움직이면 파동이 미세하게라도 이동하는 쪽으로 일어나야 하는데 정말 미동 없이 유유히 반대편에서 짠하고 튀어나오니 예측 또한 불가능했다. 점점 이새가 나의 존재를 의식하는 듯 느껴졌다. 그냥 내가 무서워서 피하는 게 아니라, 나를 조롱하듯이. 이 새 덕분에 막상 걷기를 하지는 않았지만 만보는 가뿐히 채운 거 같다. 다리를 몇 번을 건너고, 그 같이 지역을 몇 번을 돌았는지. 어제 몇 시간을 이 새 뒤꽁무니를 쫓아다닌 거 같다. 사진 한 장 좀 찍혀주지 꽤 심하고 얄미워질 지경이 돼서는 내가 오기로 이 새를 찍고야 만다는 생각에 사로잡혔고 점차 신비로웠던 새가 미워질 즘, 나의 존재가 새에게 위협적일 수도 있으며, 이새는 내가 있는 쪽을 의도적으로 피하고 있음을 깨닫고는 나의 오기를 접고 자유로이 그 자리를 뜰 수 있었다. 

돌아오는 길에 생각해 보니, 이새가 백조였는지, 두루미였는지 뭔지 도저히 판단이 안 갔다. 오늘 아침에 검색해보니, 두루미는 아닌 거 같고. 흑두루미는 머리 부분이 휜 색이 트고, 흑조는 부리 부분이 주황색을 띤다. 그럼 내가 어제 본 이 새는 무엇이었을까? 오리라고 하기엔, 너무 컸다. 그냥 내가 본 신비로운 검은색의 새라고 지정하기로 했다. 흑색. 굳이 무슨 새였는지 과학적인 이름을 알고 싶은 것은 아니었는데, 설명을 하거나 글로 쓴다면 정확한 명칭을 알아야 편리하니까. 하지만 나의 마음속에서 살아갈 새니깐 내가 정해줘도 상관없겠지. 그냥 흑새라고. 내가 마주친 백색의 비둘기와 흑새는 우연이 아니지 않았을까? 삶의 모든 구성이 그런 거 같다. 마치 거대한 초자연적 힘이 나를 주물럭대는 듯하다. 내가 간절히 원하면 원할 수 록 나에게 멀어져 간다. 내가 포기하면 포기할수록 내 손아귀로 들어온다. 내가 생각하거나 믿는 모든 것을 세계는 부정한다. 우주가 나의 믿음을 부정한다는 말은, 내 생각 말고 다른 지평을 열어준다.


 6월 4일의 기록

뭔가 정신이 없이 바쁜 날. 내 체력도 무한하지 않고 한계가 있다고. 정말 너무 피곤해서 눈꺼풀이 천근만근인데 그래도 무언가 써서 내려가는 내가 자랑스럽다. 포기는 하지 않았구나. 겨우 두 번째 기록인데 벌써 지쳐버리다니. 대단한 의지박약의 도솔아. 하지만 제패당하지는 않았구나. 장해라.

오늘은 요리를 하고 싶은 그런 마음이 자꾸만 가슴속에서 피어나더라니... 오히려 미국에 있었을 때는 더 요리를 잘 해먹었는데 이것저것 먹고 싶던 것들. 요즘은 식단 조절하느라고 막상 늘 뭘 먹을 수 있는 건가라고 생각 후, 그 범위 안에서 고르는 거 같다. 그냥 본능적으로 딱 먹고 싶은 것이 머릿속에 떠오를 때 먹을 수 있다는 게 아마 가장 행복하고 성공한 삶 중 하나일 거 같다. 나는 지금 당장 간장게장이 먹고 싶네. 하지만 간장 게장은 사만 오천 원이고 내 생활비 25만원으로는 턱도 없는 가격이기 때문에 조용히 운동을 해보련다. 저축해야지 저축!

돼지 나오는 꿈꾸고 싶다. 근데 간장게장 먹는 돼지 꿈꾸고 싶어. 내일은 기생충 후기 꼭 올립니다. 내일 지나면 현충일이고 나는 현충일에 설레는 일을 하게 될 것이에요 7시간이라도 자려면 이제 자야지. 오늘 뭔가 주절주절 일기 같은 그런 말이다. 여기에 무슨 글을 어떻게 쓰려는 건지 아무도 모른다. 심지어 글쓴이도. 


6월5일의 기록

캐릭터들을 살펴보면 오히려 부자라고 구김살이 없이 나오는 박 사장네 가족. 순수한 건지, 순진한 건지 이상할 만큼 매사에 해맑고 자신을 가정을 행복을 위하여 하루를 계획하는 연교. 충실히 일하고 자수성가하는 그리고 사회적인 약자에게도 선을 지켜주는 합리적인 박 사장. 그 바쁜 와중에도 아들의 생일 파티에는 참석하고 아들을 위해서 인디언 공연을 해주는 가정적이고 속 깊은 아빠. 동화 속에 나 나오는 부모가 아닐 수 없다. 경제적으로 풍요로워 구김살이 없는 가정. 심지어 영화 대사에 그런 말이 나온다. 돈이 구김살을 펴준다고. 반대로 기우네 식구들을 어떤 식으로든 박 사장네 가족의 등골을 빼먹으려는 계산만 한다. 심지어 치밀하게. 그들의 작전 수행 능력은 이로 말할 수 없이 완벽하다. 기우네 가족들은 자신들의 이익을 위하여서 해고당하는 운전기사나, 가정부에 대한 연민은 개나 줘버린 집단 이기적인 가족. 심지어 친구의 소개로 받은 일자리에서 친구가 좋아하는 여자와 아무렇지도 않게 바람을 피운다, 일말의 죄책감도 없이. 우리는 이들의 배타적인 행위는 영화라는 매체 안에서 코믹스럽고 익살스럽게, 관람할 수 있다. 허나, 현실에 내가 이런 상황에 처한다면 치가 떨릴 것이다. 기우네 가족은 자신의 이익 추구를 위하여 남에게 불합리적이고, 술수를 써 피해 주는 범법 행위 따위는 아무렇지 않게 하지만, 자신의 가족들이 위험에 처한 상황에는 우리 인간, 동물에게 주어진 가장 순수한 본능으로 대처한다. 부성애라든지, 모성애라든지. 대조적이게, 영화 속 내내 조여정은 단 한 번도 다송이를 안아 주지 않는다. 아이를 당연히 위하는 장면들은 나오지만, 보편적으로 모성애를 느끼기에는 많이 절제된 장면들이다. 아이의 트라우마를 전하는 장면에서 뭔지 모를 가증이 느껴진 건 나의 편식인가?... 눈에서는 눈물이 흐르고 있었지만 전혀 슬픔이 느껴지지 않았던 장면. 아이의 트라우마에 전혀 공감하지 못하고 있던 연교. 트라우마 자체보다는 트라우마가 불러일으킨 불편함에 더 신경을 쓰는 듯한 느낌이었다. 아이의 세계에 전혀 관심이 없으니, 목격한 귀신을 그린 다송의 그림을 자화상이라고 치부해버리고, 아이가 갖지도 않은 천재성을 추구해버리는 엄마.

또, 다들 백수라고는 하지만 어떻게 이런 특출한 능력이 있는 사람들이 백수라고 할 정도로 그들의 능력을 뛰어나다. 완벽한 운전을 하는 아빠, 해머던지기 챔피언인 의지의 엄마. 그리고 영어를 잘 하는 척을 잘 하는, 남을 잘 구슬리는 연기력이 돋보이는 아들. 그리고 화룡점정으로 자신감에 차 있는 포토샵 능력자인 딸. 이들의 능력은 비범하다. 전혀 평범하지 않다. 이런 우수한 능력에도, 그들은 전원 백수이다. 마치 아무리 능력이 뛰어나도 현실의 반지하를 벗어날 수 없는 영화 밖의 현실을 풍자하듯이. 일단 캐릭터들을 살펴볼 때 흑과 백으로 명백한 악당과 영웅의 간단명료한 구조는 아니다. 자신의 사회적 위치 그리고 입장에 따라 충분히 양쪽 다 공감하고 자신을 투영할 수 있도록 설정해놓았다. 신비롭게도, 절대악도, 절대선도 존재하지 않고, 악하고 성한 정황들만 존재하는 듯했다. 그렇다고 해서 절대적인 대립이 없다는 것은 아니다. 대립의 구조는 존재한다. 기생충 대 기생충 그리고 숙주.

풍요롭게 살아온 박 사장네 가족은 기우네 가족 없이는 무능력하고 삶이 돌아가지 않는다. 무능력하기 짝이 없다. 실생활에 필요한 것들이 기우네 가족들이 없다면, 이들은 일상생활이 불가능할 정도로 타격을 받기 때문이다. 과연 누가 숙주이고 누가 기생충이란 말인가? 사전적인 뜻으로 볼 때는 기생충은 스스로 노력하지 않고 남에게 덧붙어서 살아가는 사람을 낮잡아 이르는 말이다. 하지만 이 또한 흑과 백처럼 명료하지는 않다. 왜냐면 결국 두 가족 모두 박 사장네서 실질적으로 기생하고 있기 때문이다. 마치 우리 사회의 구조를 비평하는듯하다. 흔히들 사회구조는 피라미드, 특히 자본주의의 경우 그렇게 나누어진다고 생각하는데, 내 생각에는 그렇지 않은 거 같다. 살아가면서 사람은 혼자 살아갈 수 없는 존재이다. 우리는 모두가 모두에게 도움을 간 적적이든 직접적이든 받는다. 나는 농사를 지을 수 없고, 배수관을 뚫을 수 없다. 이러한 경우, 우리는 서로가 서로에게 명백히 도움을 받고, 또 도움을 주는 사회이다. 하지만 급진적인 빈부의 격차. 본인보다 낮은 계층, 즉 내가 하기 싫은 일을 해주는 사람에 대한 혐오, 혹은 적대감이 만연히 드러나, 빈부격차 중 빈의 소속된 사람들끼리의 경쟁이 아주 심하기 때문이다.

영화를 보면, 기생충과 숙주의 대립이 아니라, 오히려 기생충과 기생충의 대립이라는 느낌을 받는다. 이것은 우리 시대상을 아주 잘 묘사하고 있다. 지하실에서 갇혀서 살게 된, 사업이 망한 아저씨는 자수성가한 박 사장에게는 리스팩을 외치며, 오히려 기우네 식구에게 적개심을 드러낸다. 그들을 물리쳐야 하는 장애물이라고 인식하는 것이다. 이렇게 기생충의 가장 큰 매력은 기생과 숙주의 대립이 아닌, 기생하는 두 가족의 대립이다. 그의 전작들에는 명백히 대립구조가 있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흑과 백처럼 어느 한쪽을 절대악도, 절대선으로도 그리지 않았다. 덜 악하고 덜 선한 등장인물들. 서로가 서로 나름의 타당한 이유가 있고 그러하여 행위조차 이해로 받아들여지는 그런 대립구조였다. 그런 후에, 그는 꼭 그만의 방안을 영화 속 엔딩에 제시해 넣었다. 봉준호의 세계관을, 아주 이성적인 세계관 말이다. 설국열차에서는 어린아이와 여자가 다시금 세상으로 나와 살아갈 수 있음을 보여줬고, 괴물에서는 바이러스는 발견하지 못하고 다시금 한강을 한강으로 돌려놓았고, 그리고 옥자에서는 옥자와 미자의 해피엔딩을 그리며 공존하자라는 메시지를 던졌다. 하지만 기생충은 조금 달랐다. 그는, 기우의 상상 속에 모든 것을 맡기였다. 내가 아는 봉준호라면 기우의 상상이 현실이 되는 그 순간 영화는 엔딩크래딧을 올렸어야 했다. 하지만 그는 다시금 기우를 처참하고 그리고 비루한 그의 반지하 현실로 돌려놓으면서 영화를 끝낸다. 왜 그랬을까? 아마 봉준호 감독이 우리 시대 정황 속 더 이상의 무의미하고 불가능한 탁상공론적인 희망은 대안이 아니라고 말해주는 것처럼 말이다. 빈부의 격차는 너무나도 커지고 더욱더 커져, 이제는 돈이 돈을 버는 자본주의는 초자본주의를 낳고 있다. 홍수가 오는 날 일부러 비를 맞아도 비가 새지 않는 미제 텐트와 내리는 비에 자신들의 모든 것이 비에 침식당하는 대비를 통해 그 둘의 빈부격차를 명료히 말해주고 있다. 또 박 사장네 집에서 쫓겨나오듯 도망을 치던 밤 기우네 가족은 방대한 양의 가파른 계단을 내려온다.  그 계단 또한 그들의 좁혀질 수 없는 격차를 상징하고 있다. 영화에서는 기우네 가족을 늘 계단을 마주한다. 하지만 정말로 그 계단을 올라가는 길을 없다. 박 사장네의 가족은 계단에서 하단하는 경우가 별로 없다. 그들의 삶은 늘 올라가는 수직 상승하는 구조이기 때문이다. 그들은 밑으로 나락으로 내려갈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가장 큰 문제는 우리가 같은 계층 간의 종족 혐오이지 않나.. 미세한 하향 구조에도 치가 떨리고, 점점 인간의 존엄에 면역이 없어진다. 동경만 하고 자책만 한다.

가장 인상 깊은 봉테일은, 아마도 인디언 캠프이지 않을까? 미국의 indeginious people (토착민) 을 인도의 사람들, 즉 인디언 (Indian)이라고 생각했던, 신대륙일 거라고는 생각도 못 한 콜럼버스가 정의한 이름. 인디언. 깃털 모양의 머리장식과, 자연친화적인 옷을 입은 사람들을 통상적으로 부르는 말. 원래의 소유권자들을 말살하고 새로이 땅을 주장한 콜럼버스. 가장 아이러니한 것은 그런 잔혹한 인디언 문화를 성립시킨 자들에게서 인디언의 캠프를 사들였다는 것. 그리고 인디언이기를 원하는 것. 물론 세세한 봉테일이 너무 많지만 냄새와 선의 비유라든지, 수석, 변기 등의 메타포까지. 나열하자면 밤새우니깐 봉테일이니까..

여담으로, 영화가 사회를 바꿀 수 없다는 사람이기에 이런 영화가 나올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해 본다. 정말 강추함. 여태까지 봤던 호호커플의 케미는 이제 뒤로하고 호식커플의 케미 등장이다. 그냥 내가 개인적으로 투영하고 싶은 결말은, 물성 있는 것의 악취는 지울 수 있지만 인간 본연의 악취는 지워지지 않는다는 거.


6월 6일의 기록

여행의 묘미는 아마 계획대로 되지 않음에 있지 않을까? 오늘 나의 계획은 모두 다 틀어짐에 있었나 보다. 하지만 하루의 끝에 꽤나 괜찮은 일들이 쏟아지고 마음 한편 이 따스해지는 일들과 소소하지만 큰 울림을 주는 만남의 연속이었다. 즉흥적이지만 계획적인 모순 가득한 성격 덕에. 자주 못 갈 거 같은 카페가 피난처가 될 만큼 편안해졌고, 달달한 디저트 하나에 기분이 좋아진다. 폭신폭신한 생크림에 얼굴에 웃음이 퍼지기도 하는 내가 나는 꽤나 맘에 들었다. 불과 일 년 반사이의 변화들이다. 소소한 일상적인 대화의 흐름을 느끼고, 온전히 작업할 수 있는 하루를 얻음에 감사하고. 체리 같던 서프라이즈 만남도 오래 뇌리에 박혀있지 않을까 싶다.

편견이 깨질 때, 신뢰가 쌓이기도 하고, 신뢰가 쌓일 때, 편견이 깨지기도 한다. 그것은 값진 경험이며, 진실된 경험이다. 새로이 알아가는 감정들과 마주하는 것은 어쩌면 나 자신이 스스로에게 자해하여 다시금 나를 건설해가는 작업인 거 같기도 하다. 끊임없이 자책하고 채찍 한 후 나를 신뢰와 편견으로 다시 재건축하는 순환. 그 과정이 어제같이 단순 명료해진다면 오랜 기간해볼 만한 거 같다.

반년이 넘게 먹어온 앞으로도 약 몇 년 먹어야 하는 약이 있다. 빼먹을 수 없어, 의사선생님이 요일을 지정해서 먹으라고 하신 뒤로는 하루도 빼먹은 적이 없이 잘 먹었다. 계획적으로 살아지는 삶에 은근히 스스로가 대견했는데. 어제 약을 먹는 것을 까먹었다. 오늘 밴드를 꺼내다가 파우치에 들어있는 여분의 약을 보고 기억해낸 사실이다. 아 내가 어제 약을 빼먹었다고. 오늘 아침까지 자각조차 하지 못한 내가, 탄식이 나오려다가 너털웃음으로 바뀐 내가, 뭔지 모르게 뭉클했다. 어제는 어제의 흐름으로 내가 정말 어제를 살았다. 그 기분이 달콤했다. 취하고 싶지 않지만 취할 수밖에 없는 기분이라 조금 초초해진다. 이제는 정말 빼먹지 말아야지 하면서 내 내적 갈등은 은근히 은연중 까먹기를 바라겠지. 우주는 나를 관통시키니까.